북 치는 소년 병사



북

병사들이 줄을 지어 행진하거나 대형을 이루어 적을 공격할 때마다 북을 울려 주는 소년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옥과도 같은 전쟁터에서 조금도 겁먹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고 병사들과 함께 퇴각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모처럼 한가한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호숫가를 거닐며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을 응시하는데, 한줄기 찬란한 빛이 번뜩였습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옷에서 떨어진 천 조각이었습니다. 소년 병사는 천 조각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누에고치처럼 좁은 침낭 속에 들어가 새우잠을 청했습니다. 난데없이 어둠 속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년 병사님, 눈을 뜨세요. 제 옷을 돌려주세요.”

소년 병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허공을 쳐다보았습니다.

“뭐라고요?”

“호숫가에서 주워 오신 옷 말이에요. 저는 이웃 나라 공주인데, 유리 언덕 꼭대기에 사는 마녀의 저주를 받았답니다. 저녁마다 호수에서 목욕을 하고,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지요. 하지만 옷이 없어 돌아갈 수 없답니다. 그리 되면 마녀 손에 죽을 거예요.”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사실이라면 돌려 드려야지요. 여기 있어요.”

소년 병사가 베개로 사용하려고 둘둘 말아 둔 군복 밑에서 천 조각을 꺼내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 모습을 볼 수 없어도 천 조각을 낚아채는 작고 부드러운 손길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잠깐만요, 공주님! 유리 언덕에 가는 길을 일러 주세요. 제가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소년 병사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네 보지만, 목소리는 슬프기만 했습니다.

“당신이 유리 언덕을 찾아올 수 있다 해도 별수 없을 거예요. 유리 언덕을 무슨 수로 기어오를 수 있겠어요.”

“그건 나중 문제니까 걱정 마시고, 거기 가는 길을 어서 알려 주세요.”

소년 병사가 재촉했습니다.

“호수를 건너면 끝이 없이 넓은 숲이 나와요. 우선 숲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매우 조심해야 해요. 사람 잡아먹는 거인족이 살거든요. 그다음에는……. 아,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어둠 속 소녀는 백조가 날갯짓하는 소리를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튿날 먼동이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황금 단추가 달린 군복을 차려입고, 등에 북을 짊어지고, 허리춤에 북채를 찔러 넣고서 소년 병사가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호수 맞은편의 숲은 평화로웠습니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어두컴컴하기는 했지만, 사람 잡아먹는 거인족이 사는 곳 같지는 않았습니다. 소년 병사는 행진할 때처럼 북을 앞에 세우고 북채를 꺼내 들었습니다. 북소리가 나무 사이로 퍼져 나갔습니다.

“둥, 둥, 둥! 두르르르릉!”

불현듯 참나무만큼 덩치가 큰 거인이 나타났습니다. 곰처럼 거친 털이 온몸을 뒤덮고, 수레바퀴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콧구멍이 컸습니다.

“얘, 이 인간 벌레야! 이 시끄러운 소리는 대체 뭐냐?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지렁이처럼 짓밟아 줄 테다!”

거인이 천둥 치듯 소리쳤습니다. 소년 병사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맞섰습니다.

“야, 이 덩치만 큰 바보야! 너야말로 시끄럽구나. 허튼소리 마라. 나를 죽이려 들면 최소한 1,000명이 넘는 병사들을 이리로 불러올 북소리를 내겠다.”

“그래? 그럼 걔들도 모두 짓밟아 죽이면 되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거인은 약간 겁먹은 표정이었습니다.

소년 병사가 마지막 한 방을 먹였습니다.

“병사들이 진군해 오면 너는 살아남지 못해. 대포라는 것이 있는데, 한 발만 발사해도 너는 오징어포가 될 거야. 원한다면 이 북을 울려 주지.”

거인이 온순한 양이 되어 애원했습니다.

“안 돼, 그러지 마! 우리 타협하자. 우리 거인족이 숲에서 계속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준다면 어디든 가게 도와줄게.”

“좋다! 나를 유리 언덕에 데려다 줘. 참나무만큼 긴 다리를 지녔으니까 순식간에 갈 수 있겠지?”

소년 병사가 부탁하자,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거인은 소년 병사를 어깨에 태우고 유리 언덕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직행 열차는 아니었습니다. 얼마쯤 가다 다른 거인의 단춧구멍으로, 또 얼마쯤 가다 다른 거인의 머리 위로 옮겨 타야 했습니다. 이렇게 롤러코스터 탄 기분을 실컷 만끽하는데, 어느새 유리 언덕 기슭에 당도했습니다.

깎아 세운 듯 가파른 유리 언덕은 일부러 기름걸레로 윤을 낸 듯 매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라 거인도 별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간절한 눈빛을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소년 병사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가까워 왔습니다. 두 사내가 서로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붓는데, 금방이라도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습니다. 소년 병사가 두 사내를 간신히 뜯어말렸습니다.

“다 큰 어른들이 뭐 하는 짓이에요? 대체 무슨 사연인지 말씀이나 해 보세요.”

첫째 사내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희한하게 생긴 안장을 손끝으로 가리켰습니다.

“저것 때문에 그래.”

소년 병사가 별일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안장 아니에요? 어라, 안장을 얹을 말은 대체 어디 있어요?”

둘째 사내가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훔치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말은 필요 없어. 그냥 안장에 올라앉아, ‘이랴, 어서 가자!’ 하고 목적지만 말해 주면 안장 혼자 알아서 간다네. 가령 ‘태평양 건너 동네로 가자!’ 하면, 삽시에 그곳에 도착하지.”

둘째 사내가 말을 마치면서 상대방을 험상궂게 째려보았습니다.

“야, 신기한 물건이네요! 아저씨들은 정말 좋겠어요. 아무 데나 다 가 볼 수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웬일로 싸우는 거예요?”

둘째 사내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글쎄, 저자가 저 먼저 타겠다고 설치잖아. 저건 분명 우리 둘의 공동 재산인데 말이야. 그러니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어?”

첫째 사내가 가슴팍으로 둘째 사내를 밀치며 끼어들었습니다.

“거짓말 마, 이놈아! 네가 먼저 타겠다고 우겼잖아!”

당장에라도 치고받을 태세였습니다. 소년 병사가 소리를 빽 질러 둘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만! 어느 분 말씀이 옳은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가 판결을 내려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안 그랬다간 두 분이 죽을 때까지 싸우실지도 모르겠어요.”

소년 병사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셋이 서 있는 자리에서 정확히 100보 지점에 나뭇가지를 꽂고 돌아왔습니다.

“저기 먼저 달려가 나뭇가지를 이리로 가져오는 분이 먼저 타면 되지 않을까요? 자, 제가 북을 울리면 동시에 출발하는 거예요. 어때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두 사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른들이 준비 자세를 갖추자, 소년 병사가 북채를 높이 들었다가 꽝 내리쳤습니다.

두 사내가 꽁지에 불이 붙은 꿩처럼 쌩 달려 나갔습니다. 소년 병사가 이 모습을 지켜보며 히죽 웃었습니다. 다음 순간 그는 훌쩍 안장에 올라타 명령했습니다.

“유리 언덕 꼭대기로 가자!”

거센 바람과 함께 안장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습니다. 비행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아름드리나무가 휘청거리는 것이, 꼭 온 세상이 삐걱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윽고 안장은 와지끈, 덜커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리 언덕 꼭대기에 착륙했습니다. 바람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연못 물을 빨아 올렸다 흩뿌리는 바람에 온몸이 흠뻑 젖었습니다.

연못 너머로 집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시커먼 하늘로 뻗은 커다란 손가락을 닮아 무척 섬뜩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현관문을 두드렸습니다. 한동안 아무 반응이 없다가 삐거덕 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흐리멍덩히 초점이 맞지 않는 눈, 낡은 밧줄 같은 머리카락, 코에서 볼 위로 축 늘어진 호두만큼 커다란 사마귀를 지닌 흉측한 노파가 나타났습니다. 공주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마녀가 틀림없었습니다. 벽난로 옆에 앉아 사납게 쏘아보는 검정고양이도 증거였습니다. 소년 병사는 아무 내색도 않고 태연히 행동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죄송하지만 하룻밤 묵어가도 될까요? 돌이라도 먹을 만큼 배가 고프고, 얼어 죽을 것처럼 춥군요.”

노파가 잔뜩 목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정 원한다면 받아 주겠지만 먼저 시키는 대로 하거라.”

노파가 짐승의 발톱처럼 길쭉한 가운뎃손가락에서 뽑은 골무를 건넸습니다.

“우선 골무를 가지고 연못 물을 남김없이 퍼내거라. 그런 다음에는 물고기를 몽땅 끄집어내서 종류에 따라 길이 순서로 연못가에 줄지어 세우고. 일을 모두 마치지 않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아유, 어떡하지?”

소년 병사가 유리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북을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얘, 너라도 나를 도와주면 좋을 텐데. 에라, 모르겠다. 북소리나 들려주렴.”

어쩜, 이럴 수가? 소년 병사가 깜짝 놀라 유리 바위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습니다. 처음에는 북이 말을 하나 의심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저번에 만났던 예쁜 소녀의 목소리였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을까요?”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자, 꽃처럼 아리따운 소녀가 서 있었습니다. 소년 병사는 소녀에게 넋을 빼앗겼습니다.

소녀가 빵과 고기를 담은 바구니를 내려놓았습니다.

“먹을 것 좀 가져왔는데…….”

소년 병사가 허겁지겁 달려들어 음식을 먹었습니다. 배가 등에 붙을 만큼 허기진 터라 체면 차릴 새도 없었습니다.

식사를 마치자, 소녀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옆에서 편히 쉬세요. 노파가 시킨 일은 제가 할 테니까요.”

안 그래도 겨울잠을 앞둔 곰처럼 졸려서 아무 데나 쓰러져 자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소년 병사는 소녀의 무릎을 베고 금세 곯아떨어졌습니다.

소녀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를 돌렸습니다.

“연못 물아, 연못을 떠나라! 물고기야 연못가로 나와 줄지어 서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못에서 물기둥이 솟아올라 구름 위로 올라갔습니다. 또 물고기들은 팔딱팔딱 연못가로 뛰어올라 종류별로 길이 순서에 따라 가지런히 늘어섰습니다. 잉어들, 붕어들, 송사리들, 미꾸라지들……. 마지막으로 메기 한 마리!

소년 병사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소녀가 메기를 가리키며 일러 주었습니다.

“노파가 ‘쟤는 왜 혼자냐?’ 하고 물을 거예요. 그럼 ‘이 녀석은 당신을 위한 물고기랍니다, 늙은 마녀님!’이라고 대답하면서 노파에게 던지세요. 알겠지요?”

이윽고 노파가 나타나 “쟤는 왜 혼자냐?” 하고 물었습니다. 소년 병사는 소녀가 일러 준 대로 대답하며 메기를 집어 던졌습니다. 메기가 파드닥 꼬리를 흔드는 바람에 노파의 얼굴에 고기비늘 몇 개가 박혔습니다.

노파는 돌덩어리처럼 굳은 표정으로 소년 병사를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검정고양이가 따뜻한 벽난로 옆을 내주기 싫다며 털을 바짝 세웠습니다.

이튿날입니다. 새벽부터 노파가 소년 병사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어제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오늘은 집 뒤 숲으로 가서 나무를 몽땅 베어야 한다. 한 그루도 남김없이 말이야!”

“연장은 주시나요?”

노파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었습니다.

“밖에 나가면, 도끼와 쐐기와 망치와 톱을 찾을 수 있을 게다. 나무를 베는 것으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가지를 쳐내고, 알맞은 길이로 잘라, 석 자 높이로 쌓아야 한다. 명심해라.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끝내야 해!”

노파에게 등을 떠밀려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연장은 겉보기만 그럴듯할 뿐 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썩은 나무 자루에 달린 도끼, 종이처럼 얇은 쇠로 만든 쐐기와 망치, 성한 이가 거의 없는 낡은 톱!

가지고 가 봤자 짐만 될 엉터리들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어이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도끼질에 도끼날은 맥없이 주저앉았습니다. 톱으로 쓰러진 나무를 손질해 보지만, 역시 껍데기에 흠집도 내지 못하고 이가 우두둑 부러졌습니다. 쐐기나 망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간은 자꾸 흘러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가까워졌습니다. 소년 병사가 가슴을 쥐어뜯는데, 소녀가 살며시 다가왔습니다. 소녀가 점심거리가 담긴 바구니를 내놓으며 위로했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맛있게 드시고 한잠 푹 주무시고 나면, 일이 다 끝나 있을 거랍니다.”

소년 병사가 잔뜩 먹고 배를 두드리다가 금세 잠이 들었습니다. 소녀가 다시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를 돌리며 명령했습니다.

“나무야, 도끼에 잘린 듯 쓰러져라! 나무야, 톱으로 다듬고 잘린 듯 통나무가 되어라! 나무야, 석 자 높이로 차곡차곡 쌓여라!”

명령은 완벽하게 실현되었습니다. 한동안 숲은 시골 장터처럼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러다 소란함이 가라앉았는데, 한쪽 귀퉁이에 따로 놓인 나뭇가지 하나가 눈에 거슬렸습니다.

잠에서 깬 소년 병사가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당신은 노파보다 훨씬 더 위대한 마법사군요!”

소녀가 소리 없이 빙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노파가 일이 제대로 되었나 확인하러 올 거예요. 그때 저기 따로 놓인 나뭇가지로 무얼 할 거냐고 물으면, ‘이 녀석은 당신을 위한 나뭇가지랍니다, 늙은 마녀님!’이라고 대답하면서 노파에게 던지세요. 내일 마지막 임무를 떠맡길 텐데, 저는 더 이상 도와 드릴 수가 없어요. 오로지 당신의 용기와 지혜로 헤쳐 나가야 한답니다.”

저녁나절이 되어 노파가 나타났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통나무 더미를 둘러보다가 귀퉁이에 놓인 나뭇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저 나뭇가지는 어디에 쓰려고 남겨 두었느냐?”

소년 병사는 소녀가 일러 준 대로 대답하며 나뭇가지를 노파의 얼굴에 냅다 집어 던졌습니다. 나뭇가지에 맞은 노파가 뒤로 자빠졌습니다.

노파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습니다.

“내일 마지막 임무가 기다리고 있다. 통나무를 한데 모아 높이 쌓아 올리고 불태워야 하지. 만약 이 일을 완수하면 곱게 살려 보내 주겠다. 하지만 유리 언덕에서 살아서 나간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만은 꼭 명심해라, 오호호!”

소년 병사는 이튿날 이른 새벽부터 숲으로 나가 통나무를 쌓았습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습니다. 드디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마지막 통나무가 맨 꼭대기에 놓였습니다. 그 순간 통나무 더미 전체에 확 불이 붙었습니다. 소년 병사는 맹렬하게 꿈틀거리는 불꽃을 피해 더미에서 멀찌감치 물러났습니다.

어느 겨를에 등 뒤로 다가선 노파가 목쉰 소리를 냈습니다.

“이봐, 정말 따뜻하지?”

소년 병사가 돌아보는데, 노파가 지팡이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가리켰습니다.

“어라, 저기 불이 붙지 않은 통나무가 하나 있네. 어때, 자네도 보이지? 어서 가서 꺼내 오게. 웬일인지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겠나?”

자신을 죽이려는 꿍꿍이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용기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소년 병사가 머뭇거리지 않고 씩씩하게 불 속에 뛰어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소년 병사는 끄떡없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 그슬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불 속에서 꺼내 온 통나무가 아름다운 소녀로 변신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소년 병사가 저주에서 풀어 주기 위해 달려온 바로 그 공주님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위기 때마다 그를 도와준 소녀이기도 했습니다.

노파가 공주의 손을 낚아채며 소리쳤습니다.

“너는 약속대로 살려 보내 주겠다! 그러나 공주는 여기 머물러야 한다!”

소년 병사가 날쌔게 몸을 날려 노파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노파가 시뻘건 불길 속에 던져졌습니다. 까만 연기가 확 일면서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풍겨 나왔습니다. 이윽고 연기는 까만 깃털이 덮인 새로 변해 서쪽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공주가 허리 숙여 인사했습니다.

“저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군요. 어떻게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저의 신랑이 되어 주세요.”

소년 병사가 환하게 웃으며 공주를 꼭 껴안았습니다.

“마녀의 집에 온갖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답니다. 가서 한번 둘러보셔야지요. 당신이야말로 그 주인이니까요.”

공주가 소년 병사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정말이지, 눈이 툭 튀어나올 만큼 많은 보물이 무더기무더기 쌓여 있었습니다. 소년 병사는 욕심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만 챙겼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고도 남았습니다.

지긋지긋한 유리 언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주가 반지를 돌렸습니다. 순식간에 두 연인은 소년 병사의 부모님이 사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공주와 떠나기 전에 먼저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공주는 도시로 이어지는 산모롱이에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둘이 가면, 오래 머물러야 하니까 혼자 다녀오세요. 참, 두 가지만 꼭 약속하세요.”

“두 가지라니요?”

“첫째, 영원히 저를 사랑해 주셔야 해요. 둘째, 부모님께 인사할 때 오른쪽 볼에 입을 맞추면 안 돼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당신은 즉시 저를 잊게 된답니다. 아시겠지요?”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말을 따를게요.”

소년 병사가 공주를 안심시키고, 부모님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싸움터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오자, 부모님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아들을 힘껏 부둥켜안고 양쪽 볼에 번갈아 입을 맞추었습니다. 소년 병사도 얼떨결에 양쪽 볼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거짓말처럼 머릿속에서 공주에 대한 기억이 지워져 버렸습니다.

몇 달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보석으로 아름다운 저택을 지었고, 어머니는 예쁜 색싯감을 구해 왔습니다.

“결혼식은 사흘 후란다, 얘야.”

그녀에게 털끝만 한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효성 지극한 아들은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편 목이 빠져라 기다려도 연인이 나타나지 않자, 공주도 도시로 들어왔습니다. 소년 병사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찾아 주기를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결혼식에 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어찌할까 밤새 고민하던 공주가 반지를 돌렸습니다. 노란 햇살로 짠 듯한 우아하고 찬란한 드레스가 등장했습니다. 곧이어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결혼 연회장으로 향했습니다. 연회장에 왁자지껄 소동이 났습니다. 사실 소동의 주인공은 새색시였습니다. 새색시가 연회장을 가로질러 공주에게 뛰어갔습니다.

“그 드레스 저한테 파세요, 네? 원하는 대로 황금을 드릴게요.”

“아니오, 이 옷은 돈 받고 파는 물건이 아니랍니다.”

공주가 새색시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야 찾으면 되지 않겠어요? 오늘 밤 신방 문 앞에서 밤을 새우게 해 준다면, 거저 드릴 수도 있는데…….”

“그래요! 그거야 별일 아니지요.”

새색시가 남는 장사를 하고 신이 난 상인처럼 씩 웃었습니다.

그날 밤 새색시는 소년 병사의 술잔에 수면제를 탔습니다. 그가 신비에 싸인 미인과 마주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깜깜한 밤 사방이 고요해지자, 공주가 신방 문을 살짝 열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했습니다.

사랑하는 소년 병사님,
제 노래 좀 들어 보세요.
저를 벌써 잊으셨나요?
마녀가 괴롭힐 때
제가 돕지 않았던가요?
영원히 저를 사랑한다던
맹세를 떠올리세요.
사랑하는 소년 병사님,
제 노래 좀 들어 보세요.

수면제를 마시고 통나무처럼 쓰러진 소년 병사가 그 노래를 들을 리 없었습니다. 결국 공주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공주가 반지를 돌려 새 드레스를 차려입었습니다. 은색 달빛으로 짠 듯한 은은하고 화사한 드레스였습니다. 공주가 연회장에 도착하자, 새색시가 쪼르르 달려 나와 드레스를 졸랐습니다. 공주는 다시 한 번 신방 앞에서 밤을 새우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소년 병사님,
제 노래 좀 들어 보세요.
저를 벌써 잊으셨나요?
마녀가 괴롭힐 때
제가 돕지 않았던가요?
영원히 저를 사랑한다던
맹세를 떠올리세요.
사랑하는 소년 병사님,
제 노래 좀 들어 보세요.

하지만 이번에도 허탕이었습니다. 수면제에 취한 사람을 어떻게 깨울 수 있겠습니까?

사흘째 되는 날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공주 편을 들었나 봅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돌던 이상한 소문이 소년 병사의 귀까지 들어갔습니다. 신비에 싸인 미인이 신방 앞에서 이틀 밤을 새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냥 웃어넘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를 수 있나 궁리하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새색시가 건네준 술을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진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그날 밤은 마시는 시늉만 해 보이고 술은 화분에 버리기로 했습니다.

이윽고 사흘째 밤도 이슥해졌습니다. 소년 병사가 잠이 든 척 눈을 감았습니다. 새색시도 이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윽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영롱한 별빛으로 짠 듯한 순수하고 황홀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소년 병사님,
제 노래 좀 들어 보세요.
저를 벌써 잊으셨나요?
마녀가 괴롭힐 때
제가 돕지 않았던가요?
영원히 저를 사랑한다던
맹세를 떠올리세요.
사랑하는 소년 병사님,
제 노래 좀 들어 보세요.

소년 병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머리를 휘감았습니다. 사방이 빙글빙글 돌면서 머리가 터져 버릴 것처럼 아팠습니다. 조각 그림 같은 이미지들이 번쩍번쩍 불을 토해 내며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오, 이럴 수가! 유리 언덕, 마녀의 저주, 오른쪽 볼에 입맞춤? 아, 내 사랑!’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환한 빛이 비쳐 들어왔습니다. 소년 병사가 벌떡 일어나 공주를 뜨겁게 끌어안았습니다.

부모님은 아직 깨어 있었습니다. 소년 병사는 공주의 손을 꼭 붙잡고 그사이 있었던 일을 찬찬히 설명했습니다. 이해심 깊은 부모님은 공주를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사흘간 치러진 결혼 잔치 손님들에게 신붓감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새색시를 달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는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녀가 선녀의 비단옷보다 아름답고 값진 드레스를 세 벌이나 얻은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소년 병사와 공주의 결혼식이 성대히 열렸습니다. 두 연인은 다시 한 번 ‘불행 끝, 행복 시작!’을 외쳤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