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왕자



당나귀

임금과 왕비에게 오랜 세월 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는 기쁨도 기쁨이었거니와, 왕국을 물려줄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국 방방곡곡 종탑에서 명랑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왕비가 임신했다는 희소식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기대감에 부풀어 아기가 태어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슬프게도 열 달이 지나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아기가 아니라 당나귀였습니다!

절망에 빠진 왕비는 당나귀를 물에 빠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하늘의 뜻일 게요. 이왕 이렇게 된 것, 훌륭한 왕자로 키워 왕국을 물려줍시다.”

그 결정에 반대할 용기를 지닌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로써 당나귀는 왕자로 인정받고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아무리 낯선 사이라도 길들여지면 쉽사리 친해지게 마련입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처음의 무서움과 서먹서먹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사람들은 당나귀 왕자를 가까이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까칠까칠한 털과 딱딱한 발굽과 기다란 귀마저 좋아 보였습니다. 한편 명랑한 성격을 타고난 당나귀 왕자는 누구에게든 착 달라붙어 장난을 치고, 궁전 구석구석 기웃거리며 이 일 저 일 참견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렇다고 버릇없이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회의실이나 연주가 열리는 음악당에서는 절대 떠들거나 뛰어다니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나귀 왕자는 아기 때부터 음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온갖 음악과 모든 악기를 고루 사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류트였습니다. 이따금 떠돌이 음악가들이 궁전을 찾는 날은 잔칫날이나 같았습니다. 그들은 류트 연주에 맞추어 아름다운 옛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먼 나라의 신기한 풍경, 용과 싸우는 씩씩한 기사, 아름다운 귀부인과 우아한 공주님, 거인, 요정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당나귀 왕자는 류트 소리를 감상하는 데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연주 방법을 배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연주를 들으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궁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짐작하다시피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임금의 초대를 받아 선생으로 온 유명한 연주자도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애고, 폐하, 저런 발굽으로는 연주를 할 수 없습니다. 지판이 좁은 것도 문제이지만, 현이 배겨 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어렸을 적에 잠시 류트를 연주한 경험이 있는 임금이 살살 선생을 달랬습니다.

“지판을 넓게 해서 특별한 류트를 하나 만들면 되지 않겠나? 현도 좀 더 튼튼하게 만들어 보고. 무엇보다 자네가 신경을 많이 써 준다면 충분하지 않겠나?”

임금이 얼굴을 들이밀며 윙크를 보냈습니다.

“이보게,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일세, 명령!”

감옥에 갇히거나 왕국 밖으로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장 수업을 시작할 밖에요.

마지못해 맡은 일 앞으로 고생문이 훤하겠거니 걱정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만사가 순조로웠습니다. 당나귀 왕자에게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말 잘 듣는 연습 벌레였던 탓에 얼마 되지 않아 스승의 실력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어느덧 당나귀 왕자에게도 청춘의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아리따운 공주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울 속에서 너무나도 못난 얼굴을 마주할 때면 동그란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누가 이처럼 못난 놈을 좋아해 주겠어.’

문득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옳지, 나보다 류트를 잘 연주하는 이는 없잖아! 방랑 연주자가 되어 세상을 두루 여행해야겠다. 혹시 알아? 천생배필을 만날지.’

당나귀 왕자는 류트를 메고, 가장 충실한 하인 한 명만을 거느리고 궁전 문을 나섰습니다. 결과는 예상 밖의 대성공이었습니다. 고갯마루, 마을 어귀, 광장 어디에서건 류트를 꺼내 들고 연주를 할라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 주었습니다. 궁정 악사가 되어 주기를 부탁하는 귀족과 영주들도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길고 긴 방랑 끝에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강가에 우뚝 선 궁전에 이르렀습니다. 궁전에는 저승의 임금마저 반해 버릴 만큼 아름다운 공주님이 살았습니다. 먼발치로나마 한번 보고 싶어 무턱대고 궁전 앞을 기웃거렸습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사흘째 되는 날 발코니에 올라선 공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앞발에 턱을 괴고 기다란 귀로 얼굴을 가린 채 당나귀 왕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첫눈에 공주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당나귀 왕자가 성문을 두드렸습니다. 한동안 꿈쩍도 않던 성문이 삐거덕 소리를 지르며 활짝 열렸습니다. 경비 대장이 당나귀 왕자를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벼슬아치, 학자, 귀부인들이 와글거리는 한가운데 임금과 아리따운 공주가 앉았습니다. 류트를 연주하는 당나귀라니, 모두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이윽고 헛기침 소리마저 잦아들고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난생 처음 들어 보는 멋진 연주였습니다. 궁전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천국을 목격한 듯 기쁨에 젖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열린 문과 창을 통해 날아가는 음표들이 하인과 병사들과 백성들의 영혼마저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왕국 전체가 마법에 걸린 듯 침묵에 잠겼습니다.

어둑어둑할 때가 되어서야 연주가 끝났습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당나귀 왕자는 슬픔에 가득해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연주를 선사해도 공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으니까요.

임금이 물었습니다.

“여보게,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가? 혹시 또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아무 걱정 말게. 자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곳에 머물러도 좋아. 보수도 원하는 대로 주겠네.”

당나귀 왕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혹시 영토에 관심이 있나? 원한다면, 왕국의 반을 주지.”

임금이 농담 반 진담 반의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역시 그것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당나귀 왕자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자네 설마 내 딸을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

임금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묻자, 당나귀 왕자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습니다. 그가 기다란 귀를 쫑긋 세우고, 발굽으로 바닥을 찼습니다. 그것은 ‘공주님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요!’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웬일인지 임금은 결혼을 선선히 승낙해 주었습니다.

이튿날 결혼식과 잔치가 끝나고 신랑 신부가 신방에 들었습니다. 임금이 신랑의 하인에게 은근히 부탁했습니다.

“신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꼼꼼히 살폈다가 내게 들려주겠나?”

그날 밤 하인이 열쇠 구멍을 통해 신방을 들여다보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자가 마치 입고 있던 옷을 벗듯 당나귀의 탈을 벗어 내고, 잘생긴 청년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뿐 아니었습니다. 왕자가 멋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오, 내 사랑, 지금까지 엉뚱한 모습을 보여 주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당나귀 탈을 뒤집어써야 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공주는 새빨간 볼을 감쌀 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하인은 새벽같이 달려가 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임금은 이 말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 사람이 꿈속에서 헛것을 보았구먼. 문 앞에 기대어 잠을 잔 게 틀림없어.”

하인이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 1초도 졸지 않았습니다. 먼동이 밝아 올 때 왕자님이 다시 당나귀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정 의심스럽다면 오늘 밤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하인이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오늘 밤 기회를 틈타 당나귀 탈을 몰래 빼내 불태워 버리십시오.”

“옳아,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로다!”

임금이 무릎을 탁 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날 밤에 신방을 엿보던 임금은 적당한 기회를 노려 당나귀 탈을 빼내 태워 버렸습니다. 이윽고 동쪽 하늘이 붉게 빛날 무렵 잠에서 깨어난 왕자는 당나귀 탈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물건이나 습관이라도 막상 떼어 버리고 나면 섭섭할 때가 있게 마련이니까요.

왕자가 불안에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허둥거리는데 임금이 하인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아, 당나귀 탈은 내가 태워 버렸다네. 지금부터는 아무 걱정 말고, 내 딸과 행복하게 살 궁리만 하게. 아들딸도 많이 낳아야 하고, 내가 죽은 다음에는 이 나라의 새 임금이 되어야지.”

그다음 일은 임금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왕자와 공주는 아들딸을 여럿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물론 임금이 죽고 나서는 임금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나중에는 자기 나라의 임금 자리까지 물려받았으니까, 실제로는 두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