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의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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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오스섬의 학살, 외젠 들라크루아, 1824년, 루브르 박물관 |
출처: Wikimedia Commons


프랑스 혁명은 유럽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쳤어요.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아 오던 그리스 사람들도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1821년 독립을 이루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 그리스는 1829년 영국과 러시아의 힘을 빌려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답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키오스섬에서 끔찍한 학살극을 벌였어요.


키오스의 눈물

아름다운 관광지인 키오스섬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요. 멋진 건축물과 찬란한 햇살, 푸른 바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섬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이 그림과 아주 유별난 특산품인 유향수 나무의 수지지요.

유향수 나무의 수지는 아주 매력 넘치는 상품이어서,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정복자들이 눈독을 들이며 이 섬을 넘보는 원인이었어요. 섬마을이 요새처럼 건설된 이유도 그런 외적들로부터 수지와 자신들을 방어해야 했기 때문이고요. 그만큼 수지는 섬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수지 채집은 해마다 7월부터 10월 사이에 이루어져요. 사람들은 유향수 나무에 작은 칼집을 내지요. 칼집으로부터 물방울처럼 흘러내리는 수지는 껌, 알코올음료, 사탕, 향수 등 여러 가지 상품의 원료가 되고, 약품을 만드는 데도 쓰여요.

키오스 사람들은 이 수지를 ‘키오스의 눈물’이라고 불러요. 1822년에 있었던 고통을 추억하기 위한 이름이지요. 그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들라크루아가 그린 ⟨키오스섬의 학살⟩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먼저 키오스섬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아요.

키오스섬에서는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문화가 발달했어요. 그 뒤 기원전 1100년 무렵 이오니아 사람들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역사로 들어오게 되지요. 이오니아 사람들은 소아시아와 에게해의 섬들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그리스 문화를 이끌어 갔지요. 그러다가 섬은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에 정복되지요.

키오스 사람들은 가만있지 않았어요. 소아시아의 도시 국가들과 힘을 합쳐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었어요. 유명한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이랍니다. 전쟁이 끝나고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힘을 겨룰 때는 아테네 편에 가담했어요. 그 후 기원전 354년에 독립했고요.

독립은 잠시뿐이었어요. 알렉산더 제국과 로마 제국, 그리고 비잔틴 제국에게 차례차례 지배를 받았고, 8세기에는 아랍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지요. 13세기에 이루어진 4차 십자군 전쟁 뒤에는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차례로 손길을 뻗쳐 왔어요. 제노바 사람들이 다스릴 때 섬이 크게 발전했는데, 그러던 1566년에 오스만 제국이 섬을 점령했어요.

정말 고통스러운 역사예요. 이것만 보아도 ‘키오스의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에요. 1822년의 아픔이 섬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멀고도 험한 자유의 길

1821년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온 그리스 사람들이 독립을 외쳤어요. 프랑스 혁명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지요. 아테네에서 타오른 독립의 불길은 지중해의 여러 섬으로 번져 나갔어요. 키오스도 사모스섬 반란군의 힘을 빌려 해방되었어요.

오스만 제국이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어요.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사방에서 그리스 독립군을 공격했어요. 결국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도 무너지고 말았지요. 그리고 1822년 4월에 섬으로 쳐들어온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은 두 달이 넘도록 파괴하고 불을 지르고 섬사람들을 마구 죽였어요. 2만 5,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8만 명 정도가 노예가 되었어요.

이 사건은 목격자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지면서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어요. 같은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그리스가 유럽 문화의 뿌리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리스를 크게 동정했어요. 마침내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고, 그리스는 1829년 9월에 독립을 얻었어요. 키오스는 1912년 이래 그리스 땅이 되었고요. 서러운 ‘키오스의 눈물’이 행복한 ‘키오스의 눈물’로 변하는 순간이었지요.

그림은 이 처참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에요. 늙은 여인은 아무 희망 없이 하늘만 올려다보아요. 오른쪽 아래로 죽은 여인이 보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젖을 찾아요. 저항의 부질없음을 나타내는 듯 동강 난 칼이 바닥에 널브러졌어요. 말을 탄 오스만 제국 병사가 칼집에서 칼을 뽑아요. 여인을 끌고 가지 말라며 앞을 막아서는 남자를 죽이려고 하지요. 뒤쪽으로는 폐허가 된 들판과 불타는 집과 항구가 보여요.

이 작품을 두고 ‘예술을 통한 키오스의 복수’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어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사람들의 자유와 존엄성을 파괴하는 이들에 대해 뜨거운 분노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화가는 분명 멋진 복수에 성공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