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저금통



돼지 저금통

착하고 온순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돈 많은 부모는 소년이 원하는 족족 별의별 장난감을 다 사다 주었습니다. 소년의 방이 곧 장난감으로 그득 넘쳐났습니다.

나무 블록 세트 여러 개. 철로 놀이 세트. 그에 달린 태엽 장치로 달리는 기관차, 객차와 화물차 여러 대, 정거장, 터널, 건널목 장치. 유리와 주석 조각으로 만든 색색의 구슬, 구름 위로 떠오르고 싶어 안달이 난 구석에 걸린 종이 연, 목마, 종류별로 갖춰진 돛배들, 팽이, 그리고 무지갯빛 비눗방울을 만들어 낼 평범한 빨대…….

그중에서 소년이 가장 아낀 보물은 인형 놀이 세트였습니다. 목이 세 개 달린 용, 악마, 왕자, 공주, 마녀, 석탄처럼 까만 옷을 입고 정강이에 샌들 끈을 묶어 올린 땅딸막한 은둔자 등 인형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이들 말고도 인형은 더 많았습니다. 그들을 모두 소개하려면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질 것이 분명하므로, 서랍장 위에 올라앉은 돼지 저금통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은 장난감이 아니었지요. 그러니 먼저 오해를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돼지는 배가 잔뜩 불렀습니다. 동전 한 닢 쑤셔 넣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진흙으로 빚어 직접 색을 칠한 이 돼지 저금통이 장난감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곳에 폼 나게 자리 잡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지 않습니까? 뱃속에 가득한 동전으로 원하는 장난감은 무엇이든 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소년은 하루 종일 장난감과 놀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날마다 그들 모두와 놀아 줄 수는 없었습니다. 장난감이 웬만큼 많아야지요. 무시당했다고 섭섭해하는 장난감이 생겨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소년이 잠자리에 들면, 장난감들은 저희들끼리 놀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노란 달빛이 방 안 가득 출렁일 때였지요. 키가 큰 괘종시계가 게으른 소리로 밤 12시를 알렸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 장난감들이 하나둘씩 깨어났습니다. 기관차가 목쉰 소리로 고함을 치며 허연 수증기를 내뿜고, 목마가 앞뒤로 몸을 흔들었습니다. 화창한 봄날에 꽃들이 봉오리를 터뜨리듯 장난감 세상이 분주해졌습니다.

돼지도 눈을 떴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살짝 말입니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돈 많은 귀한 몸이라 다른 장난감들이 알아 모시는 데 무엇 하러 방정을 떨겠습니까? 돼지는 다만 그렇게 오페라 극장 귀빈석에 초대받은 것처럼 점잖게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빰빠라밤! 오늘 밤에는 무얼 하고 놀까?”

괘종시계가 열두 번째 종을 울리자, 트럼펫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누구 하나가 입을 여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술래잡기!”

“수건돌리기!”

“공기놀이!”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놀이를 졸라 대는 소리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때 의자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몸집이 큰 곰 인형이 화가 나서 투덜거렸던 것입니다. 갑자기 파도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목소리들이 잠잠해졌습니다.

“조용히 해! 밤새워 떠들기만 할 거야? 그러지 말고 사람 놀이를 해 보는 게 어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잖아.”

곰 인형의 목소리는 알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아무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어서 사람 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한데 그 놀이는 왠지 몹시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목마가 난데없이 혈통 좋은 말이 생김새도 멋있다며 시끄럽게 떠들어 대자, 다음에는 편자 하나가 헐겁다며 당장에 대장장이를 불러오라고 소리를 빽빽 질렀습니다. 괘종시계는 자신이야말로 모든 사건이 일어날 시각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정치판 이야기에 몰두했습니다. 구슬들은 자기들 중에 하나가 알고 보니 불꽃놀이용 화약이었다며 그를 당장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정거장은 또 어떻고요. 기차가 제 시간에 도착하는 법이 없다며 기관사의 게으름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인형 극장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악마들이 떼거리로 나서서 악마의 두목 루시퍼에게 떼를 썼습니다. 수영장을 지어 주지 않으면, 끝없이 활활 타올라야 할 지옥 불을 더 이상 지피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었습니다. 빨간 모자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포도주와 과자를 가져다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숲에 사는 도적 떼가 포도주와 과자를 빼앗아 갈 것이 뻔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인형 극장이 시골 장터처럼 소란스러운데 용이 얌전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용은 온몸을 꿈틀거리며 입에서 불을 뿜어냈습니다. 그리고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쉴 새 없이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공주는커녕 양 한 마리 바치는 법이 없네! 이렇게 수치스러울 데가 다 있나! 냉큼 희생 제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당장 동굴을 떠나 증기선 기관실로 갈 테야. 그곳이라면 즐겁게 지내면서 월급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의 존경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테고. 중국에서 내 친척들을 높이 떠받든다는 소문은 들어 보았을 거야.”

곰 인형이 어리석은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인형들이 너나없이 이기적으로 변해 도무지 남 생각을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당연히 인형들 사이에는 욕지거리와 싸움만 가득했습니다.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곰 인형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길게 불었습니다. 장난감들이 어리둥절해 말을 잃었습니다. 그때를 놓칠세라 곰 인형이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사람 놀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확인했을 거야!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해! 자, 사람 놀이는 그만하고, 인형 극장에서 인형 놀이나 구경하자!”

다른 장난감들이 한꺼번에 환호성을 울리며 박수를 쳤습니다.

공주 가운데 하나가 기회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외쳤습니다.

“너희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보고 싶지 않니?”

목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싫어, 싫어! 그 공주는 100년이나 잠을 자잖아. 왕자가 성으로 공주를 구하러 오기까지 그 오랜 세월을 어떻게 기다리라고!”

“그럼 ‘돌 하나로 새 두 마리 잡기’는 어떨까?”

사냥꾼이 앞으로 쑥 나섰습니다. 주인공은 따 놓은 당상일 테니까.

이번에는 용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반대했습니다.

“우리 극장에 인형이 무지 많지만, 새 인형은 없다는 것은 모르시나! 이봐, 사냥꾼 그만 잊어버리라고!”

옥신각신 다투다 날이 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헨젤과 그레텔’을 공연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극장 소품실에서 생강 과자로 만든 집과 커다란 화덕을 내왔습니다. 언제나 생강 과자 집 지붕 위에 앉아 지내는 검정고양이는 별 불만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마녀가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저 화덕에 들어가 불타는 꼴을 원할 것 같아?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럴 수는 없지, 암!”

곰 인형이 마녀를 달랬습니다.

“이봐요, 불은 무슨 불? 화덕 안에 반짝이는 것은 빨간 셀로판지일 뿐이에요.”

그제야 마녀는 출연을 약속했습니다. 장난감들과 배역을 맡지 않은 인형들로 좌석이 가득 찼습니다.

막이 오르는 순간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멋진 공연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형들의 연기는 점점 더 무르익어 가는 듯했습니다. 박수 소리, 고함 소리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공연이 막바지에 들어설 무렵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레텔이 마녀를 화덕으로 밀어 넣으려는 순간 마녀가 비명을 지르며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던 것입니다. 셀로판지가 아니라 진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대로 옮겨 붙은 불을 끄느라 인형 몇이 소란을 피우는 동안 다른 몇은 마녀를 찾아 나섰습니다. 어찌 되었든 공연을 끝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마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돼지는 반쯤 열린 서랍장 속으로 숨어드는 마녀를 보았습니다. 다른 장난감들에게 마녀가 숨어 있는 곳을 알려 주려고 서랍장 끝으로 슬슬 몸을 움직였습니다. 장난감들이 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이코,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돼지가 방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습니다. 그 바람에 동전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방 안 가득 흩뿌려졌고. 바로 그 순간 수탉이 ‘꼬끼오’ 울며 아침을 알렸습니다. 이로써 돼지 저금통의 운명도 다하고, 비록 끝마무리를 짓지는 못했지만 ‘헨젤과 그레텔’ 공연도 끝이 났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은 바닥에 떨어진 돼지 저금통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방바닥에 흩어진 동전을 꼼꼼히 주워 모은 다음 부모님에게 새 저금통을 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소년의 청을 어느 부모가 거절하겠습니까? 아버지는 다음 날 새 돼지 저금통을 사다 주었습니다.

두 저금통은 단 한 가지 점만 빼고 서로를 쏙 빼닮았습니다. 새 돼지는 배가 텅 비어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는 반면, 옛 돼지는 배가 꽉 차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