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 한 닢



은화

실링 은화는 수백 년 전에 주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밤하늘의 총총한 별처럼 맑고 찬란한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따라 전 세계를 여행할 운명이었지요.

운명은 실현되었습니다. 실링은 제일 먼저 주조소가 자리 잡은 도시 시민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두카트라는 금화를 더 좋아하는 부자들의 손에서 벗어나기는 쉬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특히 노인들의 손을 벗어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젊은이들은 새것인 데다 반짝인다는 이유로 실링을 선호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석을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했지만,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여행하는 생활은 그럭저럭 참고 지낼 만했습니다. 딱 하나 구두쇠의 손에 떨어질 때는 예외라고 해야겠지요. 구두쇠는 동전이 사람들 손에서 돌고 돌게 만드는 대신 상자 속에 넣어 둔다고 다른 동전들이 귀띔해 주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아무도 찾지 못할 비밀 장소에 묻어 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동전의 수명은 다하게 되지요.

우리의 주인공이 땅속에 묻히지 않은 것은 참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안 그랬다면 이 이야기도 없었겠지요.

세상의 빛을 보고 얼마 안 있어, 실링은 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상인의 돈 자루에 실려 도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1년 동안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세상 구경을 푸짐하게 하였지요.

그런 다음 실링은 탐험을 즐기는 귀족과 함께 그 나라를 떠나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귀족이 주머니에서 실링을 발견하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습니다.

“어라, 우리나라 동전이네. 이놈을 갖고 뭘 한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실링은 귀족이 자신을 멀리 던져 버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귀족이 엄지손가락으로 실링을 공중에 튀겨 올렸다가 탁 낚아챘습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했습니다.

“그래 너를 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가 고향이 그리울 때면 꺼내 보아야겠구나. 대양을 건너고 대륙을 가로질러야 하는 지구 반대편으로의 긴 여행이니까 고향이 몹시 그리울 거야.”

실링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습니다. 넓은 세계를 실컷 유람하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습니다.

기대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머니가 여러 나라 동전들의 집합소로 변했던 것입니다. 이탈리아 동전, 벨기에 동전, 영국 동전……. 밤새도록 계속되는 새 친구들의 수다를 듣는 것도 멋졌지만, 무엇보다 신이 나는 일은 외국 땅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머니에 빠끔 뚫린 구멍 바로 옆 자리를 찜해 놓았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귀족이 잠을 자려고 의자 등받이에 바지를 걸어 놓았는데, 그만 주머니에서 굴러떨어졌던 것입니다. 글쎄, 스스로 굴러 나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 그랬다면 주머니에서 살짝 엿보는 세상 구경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탓이겠지요. 또 그랬다면 이 일은 비극이 아니었을 테고요. 어쨌든 실링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행복해했지요.

“귀족에게서 벗어났네! 새 주인을 만나 새 세계를 경험해야지. 아, 좁아터진 주머니 속에서 구리 동전들과 부대끼는 것도 참 지겨웠어. 내 고향에서는 돌멩이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것들이…….”

높이 오를수록 더 세게 떨어진다고 하던가요? 금세 실링은 풀이 팍 죽었습니다. 웬 사람이 엄지와 검지로 실링을 집어 들었습니다.

“뭐지? 이 나라 동전은 아닌데. 가짜 같기도 하고. 에이, 일단 넣어 두었다 색깔이 변하면 던져 버리지, 뭐.”

실링은 자존심이 몹시 상해 투덜거렸습니다.

“이 나라에서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나 봐. 내가 가짜 돈이라고? 정말로 나를 던져 버리면 어쩌지? 형편없는 구리 돈 취급을 하면 어떡하나?”

걱정은 현실로 다가섰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 때 실링을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 수백 년이 흘렀습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가짜 은화를 받았다며 길길이 날뛰며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을 너무나 자주 만났습니다. 실링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무척 섭섭했습니다. 사람들의 오해가 가슴 깊은 곳에서 콩콩 뛰는 은 심장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번, 똑같이 오해를 받았어도 섭섭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실링은 가난하지만 정직한 여인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여인이 실링을 바라보며 딸에게 말했습니다.

“이 동전 마음에 드니? 네게 줄 테니 갖고 놀아. 내가 가짜 돈에 속았다고 나도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단다.”

소녀는 실링의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빨간 실을 넣어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보석 목걸이라도 되는 양 목에 걸고 다녔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새 어른이 된 소녀의 결혼식 날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결혼 선물로 황금 목걸이를 준비했으니까, 볼품없는 그 목걸이는 제발 좀 끌러 버리렴.”

어른이 된 소녀가 실링 목걸이를 끄르기 전에 실링은 제 힘으로 실에서 떨어져 나와 진흙 속으로 굴러 들어갔습니다. 시어머니의 말이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지요.

얼마나 오랜 세월을 골목길 진흙탕에 누워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다시 사람의 손이 실링을 건져 올렸을 때는 심하게 낡은 데다 초록색 이끼를 뒤집어쓴 것처럼 색깔이 완전히 변해 있었지요. 초록색 동전을 사용한다는 물의 요정조차 거들떠보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주인은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대학에서 옛날 돈을 연구하는 교수였습니다.

교수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습니다.

“대단한 발견을 했네! 이렇게 오래된 실링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야!”

교수는 값비싼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실링을 깨끗이 손질해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 후 실링에 관하여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연구 논문이 작성되었습니다. 결국 실링 덕분에 교수는 뛰어난 학자의 명성을 누리는 한편, 세계 각국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과학 협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실링에게도 이 사건은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었습니다. 박물관 유리 진열대에 놓인 따뜻하고 보드라운 자줏빛 벨벳 침대에 누워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멀찍한 거리에서나 실링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호위병의 감시를 받으면서 말이지요.

‘옛날에 그 소녀가 가짜 돈인 줄 알고 내 몸에 구멍을 뚫은 것이 어쩜 잘된 일인지도 몰라. 어쨌든 나는 진짜 은으로 만든 은화라고, 은화! 그러니 의젓해야지. 앞으로는 온 세상 사람들이 나의 가치를 인정할 거야.’

실링은 기쁨에 넘쳐 골똘한 생각에 잠겼습니다.